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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6. 유일한 복음
말씀: 이현래 목사 -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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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요약
16. 유일한 복음
지금 교회가 말하고 있는 복음은 주로 종교개혁 당시에 나온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는 가톨릭이 대상이었다. 반가톨릭 운동으로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은 가톨릭을 겨냥하고 하는 말인 것이다. 루터, 칼빈, 바르트, 기타 모든 신학자는 모두 이 문제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다.
사실상 종교개혁은 루터보다 먼저 영국에서 일어났다. 그것도 역시 영국 사정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초대교회의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사는 세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주로 직접적인 겨냥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있다.
그러나 영원한 복음, 유일한 복음은 이것들과 관계가 없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종파나 종교하고도 관계가 없다. 유교가 어떻고, 불교가 어떻고, 기독교가 어떻고 이것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떻게 지어졌고 어떻게 완전한가? 그런데 왜 인간 세상은 이렇게 시끄럽고 복잡하게 됐는가?
이것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 5:12)’라는 말과 같다. 죄는 아담과 함께 왔다. 그 아담이 자기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그리고 ‘보시기에 심이 좋았다(창 1:31)’ 하시고 안식하셨던 그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 포함된 모든 사람은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의인은 예수께서 가져오셨다 하였다. 예수는 그분 자체가 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그 자리, 안식하시고 복을 주었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아담은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 3:9)’고 찾는 하나님의 찾으심에 대해서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창3:8)’ 이러고 있는 것이다. 나무를 크게 만들어 자기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다. 이 나무는 아담이 만든 자신의 소유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정해놓지 않은 모든 것은 아담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땀이 흘러야 먹고살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래도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흙으로서의 인생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
흙은 스스로는 쓸모없다. 주인에게서 버려지면 주인을 떠난다면 잡초밭이 되고, 황무지가 된다. 그러니까 주인을 만나야 한다. 경작할 주인을 만나야 한다. 경작할 주인이 와서 갈아엎고,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는 정상적인 신분이 되는 것이다. 완전하지 않은가? 주인이 없을 때는 불완전하지만 주인이 오면 완전해진다. 이것이 인생이다.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지어졌다. 남자가 오기 전까지 그는 아무것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 남자가 온 후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 했고,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이 되라(창 2:24)’고 했던 것이다.
이제 이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얼마나 완전한가!
그런데 흙이 주인을 싫어하고 여자가 남자를 싫어하면 자기들의 본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에 나무를 만들어 자기 앞을 가리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문제다. 소유로 자기를 가리려는 것이 인간 문제다.
예수는 이것을 끝내기 위해서 온 것이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 자기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도록 잃어버린 사람, 이 사람을 위해서 그는 십자가에 못박힌 채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는 하나님 같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그는 하나님이 지은 바로 그 사람으로 완전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람 안에서 비로소 잃어버렸던 나를 찾게 되고, 비로소 하나님을 안식케 하는 인간 자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안식케 한 자는 복을 받은 자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야말로 유일한 복음인 것이다.
초대교회 복음도 아니고, 종교개혁 때의 복음도 아니고, 현대 사회에서의 복음도 아니다.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유일한 복음이다.
만유는 바로 그 예수 안에 포함된다. 같기 때문이다. 운명이 같기 때문이다. 위치가 같기 때문이다.
둘이 연합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판이 이루어진다. 잃었던 동산을 찾게 되고 잃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 얼마나 완전한가! 이 얼마나 유일한가!
이제 만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생명을 생육하고 번성케 하는데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일한 복음인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단지 자기가 그것을 보지 않고 시인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는 이 축복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돌아와도 돌아온다.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다른 데는 갈 데가 없다. 가면 갈수록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고, 가면 갈수록 자기의 위치와 운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로 돌아와야 된다.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이 사람 안으로 돌아와야 되는 것이다.
유일한 복음!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놀라운 지혜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하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전 1:18)’고 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하여 보이는 것이지만 구원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전 1:23)’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 곧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지혜는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의롭고 거룩하고 온전하다. 이것이 유일하지 않은가? 이 이상 무슨 다른 길이 있는가!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유일하다고 한다. 다른 것과 관계가 없기 때문에 유일하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 앞으로 돌아서야 된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다. 가장 완전한 회개다. 합당한 회개다. 다른 데로 돌아서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는 것은 곧 예수에게로 돌아서는 것이다. 예수에게 돌아서면 곧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러니 유일하지 않은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